Book, Movie, Play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강가에버드나무 2010. 12. 20. 12:07


도서명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VILLAGE SWARAJ)

발행일 :

지은이 : 마하트마 간디

옮긴이 : 김태언

펴낸곳 : 녹색평론사

정   가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나바지반 트러스트’가 ‘마을   스와라지(자치, 독립)’에 관한 마하트마 간디의 글을 발췌하여 출간한책으로, 농촌 생활의 여러분야에 대한 간디지(Gandhiji, 간디에 대한 존칭 겸 애칭)의 견해가 나타나 있습니다.

간디는 대규모 공장의 대량생산 대신에 다수의 사람들이 가정에서할 수 있는 생산방식을 옹호했는데, 노동력이
있는 모든 인도사람들에게 충분한 일거리를 주고자
했으며, 이러한 목표는 시골의 마을산업과 가내공업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것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농촌지역의 놀고 있는 인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않는 경제계획은 건전하거나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며,
“굶주리고 할 일 없는 사람들에게 신(神)은 일과 양식에 대한 약속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간디는 마을 판차야트(선출된 몇 명으로 구성되어 마을 일을 돌보는 마을회의) 조직을 통한 경제와 정치권력의 분산을 강하게 호소하며, 이러한 판차야트 체계가 과학적으로 작용하면 시골의 사회적 경제적 힘을 구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침입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탈중심화된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중세적 관념에 기초한 감상적인 제안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러한 제도들이 민주주의를 안정된 기초 위에 세우는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알수 있습니다. 

서양문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런게 있다면 참 좋겠지요” 라는 간디의 신랄한 답볍은 오래된 문화에 깊이 뿌리박은 심오한 종교사상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이 주도해온 근대문명의 논리가
세계 대다수 풀뿌리 민중에게는 잔혹한 폭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근현대사의 내적 진실을 투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명징한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의 근본사상은 ‘아힘사(비폭력주의)’의 원칙, 즉 “다른 생명에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고대 이래 인도의 위대한 사상유산에 기초해 있기에,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산업주의 경제와 근대적 과학기술에 의존한 서양문명은 참된 의미
에서의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수 인류의 정신과 영혼과 삶을 고양시키는 데 이바지하기는커녕 도리어 인간성과 문화를 파괴하고,
온 세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착취와 억압을 불가피한 것으로 하는 야만적인 폭력일 뿐입니다.

간디의 궁긍적인 목표는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지금까지 인도와 세계의
온갖 지역에서의 풀뿌리 민중에 대한 착취, 억압을 옹호해온 인간 불평등 사상을 극복하고, 그러한 착취와 억압 없이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뿌리로부터 넘어서는 근원적 변화였습니다.

그는 외세에 의한 식민주의는 철처히 배격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외세의 직접적 지배가 종식되었다고 해서 식민주의가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이를 깊이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에 끊임없이 언급합니다.
식민주의는 형태를 바꾼 채 독립 이후에도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계속되어온 것이 현대사의 엄연한
현실이며, 간디의 독특함은 서구적 근대문명, 산업주의, 기계문명을 철저히 배격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간디에 의하면, 영국의 식민지로서 인도사회의 노예상태와 빈곤의 궁극적 원인은 영국 혹은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산업주의 내지 기계문명의 논리에 순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립, 자치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인도 사람들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물레(차르카)는 간디가 구상하는 새로운 문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농업과 물레로 대변되는 마을의
수공업이야말로 인도민중의 진정한 독립생활, 즉 자치, 자립의 삶에 필수적인 두가지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립후 인도는 네루의 정치적 지도 밑에 맹렬히 근대화, 산업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간디의 이러한
가르침은 무시되며, 간디의 사상은 그들에게 ‘현대국가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실제로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간디의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스와라지’ 즉
자치, 자립의 사상은 중세적 보수주의 경제사상 쯤으로 받아들여져, 경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압축적 경제성장의 결과, 농업, 농촌, 농민의 전면적인 몰락과 함께, 식량자급률 25% 수준에서 외국농산물에 대한 의존 없이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여전히 경제성장의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한국의 우리들에게 간디의 메시지는 심히 아픈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래에는 책을 읽으며 체크해 둔 부분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간디의 유명한 ‘마지막 유언’에서 그는 인도가 정치적 독립을 얻었지만 “도시들과 구별되는 70만 마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 사회적ㆍ도덕적ㆍ경제적 독립을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판차야트 라지, 즉 완전한 정치권력을
가진 비폭력적이고 자족적인 경제 단위인 마을 스와라지의 모습과 프로그램을 구상하였다.

간디지가 생각한 마을 스와라지는 재산 중심인 서양경제와 달리 인간 중심이다. 그것은 생명의 경제요 서양의 것은
죽음의 경제이다.

간디지가 생각한 마을 스와라지 계획에서 당연히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마을 일꾼의 의무는, 마을들을 농업과 수공업을 통해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도록 조직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보건과 위생을 교육하고 질병과 불건강을 예방하는 모든 조처를 취하며, ‘나이탈림(간디가 주창한 수공업 일을 통한 국민교육)’의 노선을 따라 마을사람들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교육을 마련하는 것이다.

간디는 “나의 생각으로는 인도의, 그리고 세계의 경제구조가 누구도 음식과 의복이 없어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일거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은
오직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 생산 수단이 대중의 통제하에 있을때만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신이 주신 공기와 물이 그렇듯이, 또 그러해야 하듯이 모두가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기 위한 거래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나라나 민족 또는 집단이 그것을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단순한 원칙의 무시가 우리가 오늘날 이 불행한 땅뿐만 아니라 세계 다른 곳들에서도 보게 되는 빈곤의 원인이다”
라고 말했다. 

독자에게
내 글을 부지런히 읽는 독자와 내 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나는 일관성 있게 보이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생각들을 버렸고 많은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나는 내면적인 성장을 그쳤다거나 육신이 다했을 때 나의 성장이 멈출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내가 나의 신인 지리의 부름에 즉각 복종하는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나의 글들에서
불일치를 발견했을 때, 내가 아직 제 정신이라고 믿는다면, 같은 주제의 두 글 중에서 나중 것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1933년 4월 29일
M. K. 간디

스와라지의 의미
진정한 스와라지는 소수의 사람이 권위를 얻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위가 남용되었을 때 모두가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에 의해 실현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스와라지는 대중들에게 권위를 규정하고 통제할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교육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와라지는 외부적인 통제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완전한 경제적 독립이며, 다른 두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르마(Dharma) 즉 가장 높은 의미의 종교이다.
내가 생각하는 스와라지는 오직 우리 모두가 우리의 스와라지를 진실과 아힘사만을 통해 얻고 구축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게 되어야만 실현될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대중의 스와라지는 거짓되고 폭력적인 수단
으로는 이룰 수 없다. 그것들을 사용하면 자연히 반대의견을 가진 이들을 억압하고 제거하여 모든 반대 자체를 없애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개인의 자유로 나아갈 수 없다. 개인의 자유는 오직 순수한 아힘사의 체제하에서만 완전히 발휘될 수 있다.
아힘사에 기초한 스와라지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무는 알아야 한다.
상응하는 권리를 만들어내지 않는 의무는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함에서 생겨나는 권리만이 진정한
권리이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는 그들이 속한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생격난다. 그리고 그들만이 자신들에게 생격난 권리들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다. 

간디가 생각하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
이곳에서는 모든 일이 같은 등급이고, 같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이라는 유혹 때문에 부모에게서 전수받은 기술을 희생시키는 일 없이 대대로 보존한다. 공동체에 봉사한다는 원칙이 무제한의 기계적인 경쟁을 대신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충분한 여가와 기회와 교육과 문화를 위한 편의를 누리며 일한다. 그것은 가내공업과 집약적인 소규모
농업협동체로 구성된 매력적인 세계이며, 자민족 중심중의나 카스트제도가 들어설 틈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경제적인 자립이 강화되면서 개인의 자유의 범위는 최대한으로 확대된 스와데시(Swadeshi,
외래품 배척운동을 통한 자립경제)의 세계이다. 
나는 사람이 산업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산업화에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기계산업을 도입하는데 대해 큰 염려를 가지고 있다. 기계는 지나치게 빠르게 생산을 하고 그와 함께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종류의 경제체제를 초래한다. 나는 말없는 다수 인도인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직까지는 이런 목표를 위해 우리에게 기계가 필요하지는 않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부지런해지자. 더 자립적으로 되도록 하자. 기계는 우리가 필요하면,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할 때 도입할 것이다. 

평등한 분배원칙의 뿌리에는 부유한 이들이 소유한 여분의 부를 신탁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 원칙에 따르면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한푼이라도 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비폭력적으로?
아니면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야 하는가? 그렇게 하려면 자연히 우리는 폭력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조처는 사회에 이익이 될 수 없다. 사회는 부를 축적할 줄 아는 사람의 재능을 잃어버릴 것이므로 더욱 가난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적인 방법이 명백하게 더 나은 것이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소유한 채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타당하게 요구되는 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사회를 위해 사용되도록 수탁자로서
행동할 것이다. 이 논의에서 수탁자의 정직성이 전제된다. 

교육은 아이와 어른에게서 그들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 해독은 교육의 끝이 아니고
교육의 시작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문자 해독 자체는 교육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아이의 교육을 쓸모있는 공예일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생산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이 학교의 제품들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모든 학교는 자립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말하는 아힘사는 정직한 방법으로 양식을 얻기 위한 일을 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힘이 있다면 나는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모두 중지시킬 것이다. 그것은 국민의 품성을 떨어뜨리고, 게으름과 위선 그리고 범죄까지도 조장하였다. 그런 잘못된 자선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나라의
부에 보태는 것이 없으며, 그것을 제공한 사람은 좋은 일을 했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공공시설들을 만들어 거기서 기꺼이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식사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훌륭하고 현명한 일이겠는가? 다른 어떤 일을 선택해도 좋다.
다만 규칙은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이어야 한다.

우리의 교육에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두뇌는 손을 통해 교육되어야 한다. 내가 시인이라면 나는 다섯 손가락의
가능성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왜 당신들은 정신이 모두이고 손과 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손을 훈련하지 않고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의 삶에는 ‘음악’이 빠져 있을 것이다. 책에 있는 지식 만으로는 아이가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게 할 만큼 흥미를 일으키지 못한다. 두뇌는 말들에 싫증을 느끼고, 아이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리기 시작한다. 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귀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그래서 그 모두는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고, 옳은 것을 따르고, 그른 것을
피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교사는 기능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과 기능을 연관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 모든 지식을 그가 선택한 특정 기능을
매개로 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실잣기를 예로 들어보자.
물레로 몇 야드의 실을 생산했는지, 그것이 표준 바퀴수로 얼마가 될지, 혹은 내가 지은 실의 굵기가 몇 번인지 보고
하려면 숫자를 알아야 되고, 덧셈과 뺄셈, 곱하기와 나누기 즉 산수를 알아야 한다. 또한 물레판의 원으로 기하학과
관련된 원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며, <목화-인류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책처럼 목화를 처음 기른 방법과
시기, 목화 발달의 단계들, 목화 무역 등 각 나라의 역사, 경제, 문화, 정치를 자연스럽게 가르칠 것이다.

건강과 위생의 기본법칙은 단순하고 쉽게 배울 수있으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몇가지 법칙이 있다.

가장 순수한 생각을 하고, 게으르고 불순한 생각을 금하라.
밤낮으로 가장 신선한 공기를 마셔라.
육체의 일과 정신의 일에 균형을 유지하라.
곧게 서고 다른 자세로 앉고 모든 행동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하고, 이것이 당신의 내면 상태의 표현이 되게 하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 먹어라. 쾌락을 위해 살지 마라. 그러므로 음식은 몸과 정신을 좋은 상태로 유지할 만큼만 먹어야 한다. 사람은 그가 먹는 것으로 결정된다.
당신이 섭취하는 물과 음식과 공기는 깨끗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깨끗함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위에 당신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같은 세가지의 깨끗함을 퍼뜨릴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개방된 곳에서 자도록 해야 한다. 날씨의 변화에 대비해서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덮을 것을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 우기에는 우산처럼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곳을 사용한다. 그 외에는 별들이 박힌 푸른 천개가 지붕이 되어서 눈을 뜰 때마다 끊임없이 변하는 아름다운 하늘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다. 여러 별자리들이 장엄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는 일은 눈에게는 성찬이다. 그의 모든 생각에 대해 별들을 살아있는 증인으로 삼게 되는 사람은 악하거나
불순한 어떤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게 하지 않을 것이며, 평화롭고 상쾌한 잠을 즐길 것이다. 

마을 일꾼은 마을에서 약을 나눠주거나 의사노릇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피해야 하는 함정이다. 나는 하리잔들을 둘러보는 여행 도중에 한 마을에서 그 정도는 알 만한 우리 일꾼이 야단스러운 건물을 지어놓고, 그곳에 시약소를 두고 주위 마을에 무료로 약을 나눠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약은 자원하는 사람이 각 가정으로 배달해 주고 있었고, 한달에 이용 환자가 1,200명이나 된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물론 그것을 심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마을일을 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의무는 마을사람들에게 위생교육을 하여 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을 치료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꾼은 사람들에게 개인 위행과 마을 청결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도록 돕는데 집중해야 한다. 

나는 마을 일꾼이 그가 깨어있는 동안의 매시간에 대해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을 일로 채워야 하며, 그것을 일기에 분명히 언급해야 한다는 데 전혀 의심이 없다. 진정한 일기는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거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의 활동을 진실되게 기록하는 것이 어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그들은 육체적 활동만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일의 구체적인 항목을 언급해야 한다.

활기있는 운동이나 조직은 어떤 것도 외부의 공격으로 죽지 않는다. 그것은 내부의 부패로 죽는다. 필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인품, 일의 기술에 대해 지식을 키워가면서 끊임없이 행하는 노력과 엄격하게 단순한 생활이다. 인품을 갖추지 못한 일꾼, 보통의 마을사람보다 훨씬 잘 사는 생활,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지식 부족 등은 마을사람들
에게 아무런 감명을 줄 수 없다. 

진정으로 독립되고 자유로운 인도는 불행한 이웃을 돕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자신의 지역사회 너머에까지 희생정신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이기적으로 되고 자신의 지역사회도 이기적인 사회로 만들 것이다. 자기희생의 논리적 전개는,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공동체는 지역을 위하여, 지역은 광역지방을 위하여, 광역지방은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나라는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다. 대양에서 떨어져 나온 물 한방울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대양의 한 부분으로서의 물 한방울은 거대한 선박들을 가슴에 품는 영광을 함께 한다.